여자농구, 화려했던 시절로의 시간여행
여자농구, 화려했던 시절로의 시간여행
[오마이뉴스 신명철 기자] 한국이 2007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유치했습니다.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아 집행위원회는 지난 17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회의를 열고 2007년 아시아여자선수권대회를 한국에서 열기로 의결했다고 20일 대한농구협회가 밝혔습니다.
한국은 1965년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제5회(1974년), 제14회(1992년)대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 전해진 이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2006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가 신한은행 우리은행 국민은행 삼성생명 금호생명 신세계 등 6개팀이 출전한 가운데 막을 올렸습니다.
경기장소인 서울 장충체육관은 한국여자농구의 '메카'입니다. 뒤에 이야기가 이어지겠습니다만 한국여자농구의 양대 세력인 금융단-실업단의 큰 틀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금융권팀이나 일반기업팀의 얼굴은 많이 바뀌었고, 우리은행만이 옛 영화(榮華)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40대 이상의 스포츠팬들은 1960∼70년대 프로레슬링과 함께 국내 인기스포츠 가운데 하나였던 여자농구의 화려했던 시절을 기억하실 겁니다.
한국(상업은행 제일은행 조흥은행 등), 일본(유니티카 일본레이욘 일본통운 등), 대만(아동 광화 등) 등의 단일팀이 출전해 우승을 겨룬 박정희장군배 쟁탈 동남아여자농구대회가 열리는 서울 장충체육관은 발 디딜 틈 없이 관중이 들어찼고, 이 대회를 중계하는 TV앞에는 수많은 시청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한국, 일본, 대만이 출전했는데 왜 '동남아대회'였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군요).
그 시절 여자농구 인기몰이의 중심에 우리은행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상업은행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박찬숙을 영입한 태평양화학 등 비금융권팀(실업단)들이 속속 창단되면서 상업은행 제일은행 조흥은행 등 금융단 농구는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만 한국여자농구 발전에 금융단, 특히 상업은행이 끼친 공은 컸습니다.
상업은행 농구의 중심에는 박신자라는 한국여자농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가 있습니다. 숙명여중·고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1학년에 다니다 상업은행에 입단한 박신자는 전정희, 박경애 등을 주축으로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여자실업농구 최강으로 군림하던 한국은행의 아성을 단숨에 깨뜨렸습니다.
한국은행과 상업은행이 박신자를 놓고 벌인 스카우트 싸움은 요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990년대 초 휘문고등학교를 나온 서장훈이 연세대로 가느냐 고려대로 가느냐에 따라 '4년농사'가 결정됐던 것과 비슷합니다.
박신자는 국내 여자실업농구를 평정한 뒤 팀 동료인 김추자, 신항대 등과 힘을 모아 1967년 체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소련에 이어 준우승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박신자는 한국이 준우승했음에도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혀 세계적으로 기량을 인정받았습니다. 체코 대회를 마치고 개선한 대표팀의 서울시청 앞 환영행사 장면은 이따금 방영되는 1960년대를 다룬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화면에서 유난히 키가 크고 늘씬한 선수가 박신자입니다. 박신자를 주축으로 한 한국은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이어 그해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해 동유럽국가가 불참한 가운데 가볍게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1967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앞서 박신자, 나정선, 신항대 등으로 짜인 상업은행 단일팀은 1964년 페루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출전 13개국 가운데 8위를 차지해 발전하는 한국여자농구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한국은 처음 출전한 195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출전 8개국 가운데 최하위였습니다. 한국이 1965년, 1967년에 열린 제1, 2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2연속 우승하는 데에도 박신자 등 상업은행 선수들은 맹활약했습니다. 여자농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게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니까 1950∼60년대 여자농구선수들은 '선각자'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8년 말 박신자, 김추자, 김명자 등이 줄지어 은퇴한 뒤 상업은행은 강부임, 홍성화(프로농구 창원LG 현주엽의 어머니), 조복길, 박용분 등이 주력인 조흥은행의 거센 도전에 밀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조영순, 유쾌선, 김영임 등의 제일은행과도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후 10여 년이 넘도록 황선애-이옥자(연세대 야구부 이광은 감독의 누나)-최애영 등이 선배들이 쌓아 놓은 전통을 이어가려 애썼지만 강호의 이미지는 서서히 사그라져갔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박신자를 중심으로 한 상업은행 선수들이 일궈 놓은 한국여자농구의 탄탄한 저변은 이후 1979년 서울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 1984년 LA 올림픽 준우승 등으로 이어집니다. 이 무렵에는 제2의 박신자라고 불릴만한 박찬숙이 한국여자농구의 대들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