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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은퇴한 김영옥, 중국리그를 접수하다곽현 기자, 2012-03-14 04:14:19
지난 달 21일. 농구계에는 적잖이 놀랄만한 이슈가 생겼다. 작년 5월 KB국민은행에서 은퇴한 김영옥이 중국프로리그에 진출해 우승을 따낸 것이다.
더군다나 김영옥은 팀 내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팀 내 출전시간 1위였고, 득점 2위, 어시스트 1위, 3점슛 성공개수는 리그 1위였다. 챔프전 3경기에서 평균 35분여를 뛰며 평균 15.0점 2.0리바운드 3.6어시스트 1.6스틸을 기록했다. 3점슛은 3경기서 6개를 성공시켰다.
MVP급 활약이었다. 74년생으로 우리 나이 39살의 선수라면 믿겠는가? 김영옥이 굳이 중국에 가서 농구를 해야 했던 이유, 그리고 중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우승 후 인생 최고의 환대를 받았던 이야기들을 직접 들어보았다.
▲한류 스타 된 김영옥? 평생 잊지 못 할 기억
지난 달 28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김영옥을 만났다. 그녀의 남편 정경모 씨도 함께였다. 중국에서 온 지 2~3일쯤 됐다고 했다. 김영옥의 표정은 밝았다. “잘 계셨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우승을 하셨어요?” “그러게요(웃음)” 그녀의 표정이 밝았다.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한국에서 간 168cm의 작고 왜소한 선수가 어떻게 중국 최고의 무대에 섰을까? 중국은 남·녀 할 것 없이 매번 한국의 앞길을 가로막는 아시아농구강국이 아닌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 역시 할 얘기가 많았다. “중국에서 우승하고 이런저런 행사 때문에 이제야 왔어요. 어찌나 좋아해주시던지···.” 차마 말을 잇지 못 하고 감탄만 하고 있다.
남편 정 씨가 도왔다. “저는 마지막 경기하는 날 갔는데, 정말 너무 너무 놀랐습니다. 어딜 가도 다 징잉위, 징잉위 하는데,(징잉위는 김영옥의 중국 이름)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우승 하고 높으신 분들하고 식사를 하는데, 보통 선수단하고 그분들하고는 따로 식사를 하잖아요. 근데 우리 영옥이만 가운데로 불러서 함께 식사를 하시더라고요. 저는 졸지에 남편이라는 이유로 가서 인사도 하고, 그랬죠(웃음).”
“남편은 저 때문에 하루 종일 술만 먹었어요. 진짜 몇 일 동안 우승 행사하는데, 낮에도 계속 술을 마셔서 병이 났지 뭐에요(웃음).”
“우승 행사에 북경 부시장님까지 오셔서 선수단을 격려해주시더라고요. 거기서도 영옥이만 임원들 먹는 자리에 불러 같이 식사를 하시고, 저희랑 함께 사진도 찍자고 먼저 해주시더라고요. 그 정도로 저희를 환대해주시니까 정말 신기했습니다.”
실제 김영옥은 중국 북경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옥의 소속팀 베이징 그레이트워는 전통적으로 중위권의 팀이었지만, 김영옥 영입 후 정규리그 2위를 차지했고, 결국 창단 후 34년 만에 우승까지 차지했다.
농구는 중국 최고의 인기스포츠다. 2002년 국민스타인 야오밍이 NBA로 진출하면서 농구의 인기는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더군다나 수도인 베이징을 연고지로 한 프로팀이 성적이 좋으니, 덩달아 인기도 올라간 것.
남자팀인 베이징 덕스 역시 정규리그 2위를 차지하며 좋은 성적을 냈다. 베이징 덕스에는 NBA올스타 출신인 스테판 마버리(35, 188cm)가 있는데, 마버리는 화려한 개인기로 중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김영옥은 한 스포츠채널에서 ‘여자농구의 마버리’라고 소개되며 3분 이상 특집 방송되는 등 관심이 대단했다. 그만큼 한국에서 온 작고 여린 선수가 부린 마법에 베이징 시민들은 열광했다.
“농구장을 가면 모든 사람들이 영옥이를 응원해요. ‘징잉위, 징잉위’ 한국에서 몇 년을 해도 길 가면 몇 명 알아볼까 하는데, 북경 시내를 나가면 전부 다 알아보니까, 돌아다니기가 힘들다니까요.”
한 번은 우승하고 여고팀에 강의를 하러갔다. 질문들이 쏟아졌다. “어떻게 하면 언니처럼 잘 할 수 있나요?” 질문을 하러 나온 선수는 신장이 무려 187cm나 됐다. 168cm의 김영옥은 그런 선수들에게 친절히 답변을 해주는 등 최고 인기강사였다.
우승 후 어딜 가든 주인공은 김영옥이었다. 소속팀엔 국가대표선수 장판이 있었고, 감독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소개되는 사람이 김영옥이었다.
“진짜 말로 다 하지 못 할 환대를 받고 왔어요. 저는 진짜 행복해요. 살면서 그런 경험은 또 못 해볼 것 같아요.”
▲나이·신장을 초월한 김영옥의 열정
최근 몇 년 간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지역에 한류 열풍이 분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김영옥은 중국에서 한류스타 못지않은 대접을 받았다. 특히 북경 시민들에게 김영옥은 영웅이었다.
그들이 김영옥에게 반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열정이다. 중국은 한국보다 평균 신장이 10cm 가까이 큰 장신팀이다. 국가대표팀끼리의 대결을 봐도 어른과 아이의 대결을 보는 것 만큼 키 차이가 상당하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작은 선수의 모습은 중국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더군다나 74년생으로 우리나이로 39살인 그녀의 체력은 놀라움을 떠나 경이적이었다. 33.4분으로 팀 내 어린 선수, 외국선수 할 것 없이 가장 많은 시간을 뛴 김영옥이다.
아는 사람 없는 타지에서 그녀는 어떻게 적응을 해나갔을까? 어려움은 없었을까? “예전에 실업 시절에 몇 번 중국을 와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어요. 제가 먹는 것도 잘 먹고, 언어야 뭐 농구용어를 쓰면서 하면 큰 불편함이 없었어요. 통역도 붙여주셨고요,”
김영옥은 팀에 빠르게 적응했다. 먹는 것부터 입는 것, 사람, 코트, 심지어 공까지. 한국과는 모두 다른 환경에서 그녀는 적응해야만 했다. 살아남아야만 했다.
“가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전지훈련을 가는데 감독님께서 패턴이 그려진 종이들을 주셨어요. 갈 때까지 좀 봐두라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패턴을 보면서 머릿속에 집어넣었죠. 비행기에 내려서도 보면서 걸어가다가, 그만 일행이랑 떨어져버린 거에요. 감독님께서 그런 모습을 좋게 보신 것 같아요. 선수들한테 본받으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두려운 것은 없었다. 한국서도 그랬다. 농구를 하기 위해서, 단지 그거 하나뿐이었다. “적극적으로 임했어요. 다 저보다 동생들이니까 말도 제가 먼저 걸고, ‘어떻게 하자’ 하면서 의견도 내고요. 말은 잘 안 통했지만, 바디랭귀지로 최대한 제 의사를 전달했죠.”
김영옥의 적극적인 행동에 수리민 감독은 그녀를 주장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누가 주장을 했으면 좋겠냐고 하니까, 선수들이 저를 지목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죠(웃음).”
김영옥은 맏언니다웠다. 어딜 가든 당당했다. 외국선수 니키 아노시케를 달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사실 니키는 팀의 골칫덩이였던 선수. “니키는 미국에서 왔다보니 중국 음식을 잘 못 먹었어요. 항상 ‘이거 못 먹어, 저거 못 먹어’ 하고 떼를 썼는데, 제가 ‘이런 것도 먹는 거야’하면서 달랬더니, 조금씩 말을 듣더라고요.”
니키는 김영옥의 충성스러운(?) 신봉자가 됐다. “연습 때도 ‘난 영옥이 슛 쏘면 리바운드 안 들어 갈거야’라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절 믿어줬어요. 시즌이 끝난 후에는 제가 재계약 안 하면 자기도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팀원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얻은 김영옥은 플레이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감독님께서 절 좋아하고 믿어주시고, 주장까지 시켜주셨잖아요. 전 절 믿어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는 스타일이거든요. 처음 가서 연습을 하는데, 정말 슛이 다 들어가더라고요. 중국에서는 정말 아무런 부담감이 없었어요. 선수들까지 절 믿어준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울컥하더라고요.”
‘김영옥 효과’와 함께 팀은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34년 만에 우승 맛본 그레이트워
그레이트워는 승승장구했다. 지난 시즌 12개 팀 중 8위에 머물렀던 그레이트워는 지칠 줄 모르는 기세를 보이며 쉔양 골든라이온스(17승 5패)에 이어 16승 6패로 정규리그를 2위로 마친다. 지난 시즌과 비교해 장족의 발전을 보인 것. 이미 북경은 농구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남·녀 팀 모두 성적이 좋았고, 특히 여자팀은 한국서 온 작은 선수의 플레이가 대단했다.
“중국은 굉장히 터프해요. 몸싸움을 많이 하거든요. 한국 같은 경우에는 휘슬이 자주 나오는 편인데, 중국은 그렇지 않아요. 몸싸움을 보는 재미도 있죠. 리그 수준은 확실히 한국보다 높지만, 전체적으로 1, 4번 포지션은 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포인트가드와 슈팅가드를 넘나들며 활약한 김영옥은 경기 운영과 외곽슛, 돌파 등 다방면에서 팀을 이끌었다. 화끈한 득점포와 함께 어시스트, 스틸, 그리고 특유의 압도적인 수비로 상대를 제압했다.
김영옥은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 32경기를 모두 출전해 팀에서 가장 많은 33.4분을 뛰었고, 평균 14.3점 1.9리바운드 3,3어시스트 1.0스틸을 기록했다. 3점슛 성공개수는 83개로 리그 1위에 올랐고, 성공률은 47.1%였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그레이트워는 헤일롱장, 리아오닝을 차례대로 물리치고 챔프전에서 저장 파이스트를 맞아 3-0으로 완승을 거뒀다.
베이징은 감격에 빠졌다. 창단 34년 만에 첫 우승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영옥 역시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맞은 우승이라 그런지 기분이 남다르더라고요. 정말 ‘이 팀에 제가 뭔가 해주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좋은 선물을 한 것 같아 너무 기뻤어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한국에서 실업+프로 생활만 20년 가까이 뛴 그녀가 갑자기 중국에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영옥은 KB국민은행에서 은퇴 후 김천시청으로 가게 됐다. 김천시청이 그녀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
“은퇴 했을 때 김천시청 김동열 감독님께서 전화가 오셨어요. 제가 꼭 필요하다고요. 당시 너무 힘들어서, 농구를 그만두고 싶었거든요. 근데 그 정성이 너무 감사했어요. 나를 이렇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생각에 다시 농구공을 잡기로 했죠.”
김영옥은 전국체전에 나가는 조건으로 김천시청에서 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목표는 체전 우승이었다. 결국 김영옥은 김천시청에게 우승트로피를 안겨줬다.
전국체전이 열리기 전인 6월. 국제초청여자농구대회가 열렸다. 매년 열리는 이 대회는 국내 실업팀들과 외국팀들을 초청해 열리는 친선대회다. 김영옥은 이 대회에서 김천시청 소속으로 첫 데뷔전을 치렀고, 이번 대회 참가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결과를 만들었다.
일본, 말레이시아와 함께 중국에서 온 팀이 하나 있었다. 바로 베이징 그레이트워였다. 작년에도 이 대회에 참가했던 그레이트워는 시즌을 앞두고 전지훈련 개념으로 한국을 찾곤 한다. 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프로팀이었다.
대회 결승에서 김천시청은 그레이트워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레이트워 수리민 감독은 김영옥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중국에서 뛰었을 때 본 경험이 있고, 그녀의 부인과 김영옥은 친하다.
“감독님 부인이랑 예전부터 워낙 친했어요. 감독님이 절 보자마자 ‘왜 여기 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프로가 아닌 실업이었으니까요.”
그 길로 수리민 감독은 김영옥에게 적극적인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바로 외국선수로 뛰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외국선수제도가 있는 중국리그는 외국선수 한 명에 아시아계 선수는 한 명 더 둘 수 있는 규정이 있다. 수리민 감독은 김영옥의 근성 있고, 부지런한 플레이가 팀을 살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처음엔 거절했었죠. 근데 정말 계속해서 부탁하시더라고요. 대회가 끝난 뒤에도 연락을 해주시고, 또 그 정성이 고마워서···(웃음). 결국 수락을 하게 됐어요.”
김영옥은 결국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다. 오랫동안 한국과 중국 농구의 가교 역할을 해온 방복순 여사가 도왔다.
재밌는 상황이었다. 은퇴를 결심하고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중국에 진출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외의 이유는 다 부수적인 것들이었다. 그저 농구를 할 수 있다면. 나를 필요로 한다면, 그 곳이 어디든 도전하는 것이다.
▲왜 그녀는 한국에 남지 못 했나
김영옥은 대단한 일을 해냈다. 한국보다 한 수 위 리그인 중국리그를 제패한 것이다. 39살의 나이로 말이다. 그런 그녀는 왜 한국에서 더 이상 농구를 할 수 없는 것일까.
김영옥은 은퇴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다. KB국민은행과 협상 결렬 후 WKBL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감독 및 팀과 관련된 불만을 고스란히 털어놨다.
여자농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김영옥이 작성한 글의 수위가 높았기 때문. 결국 김영옥과 국민은행은 넘어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리고 같은 소속팀 감독을 비난했다. 이유가 어찌됐건, 엄연한 ‘하극상’이었다. 김영옥을 지지하는 쪽이 많았지만, 스승을 배신했다며 그녀를 비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국민은행과 협상 결렬 후 김영옥은 FA시장에 나왔다. 하지만 그녀를 불러준 팀은 없었다. 쉽사리 부를 수 있는 팀이 없었다. 김영옥은 2010-2011시즌 좋은 활약을 기록했다. 35경기 전 경기에 출전한 김영옥은 평균 14.1점 3.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득점상(최다)과 3점슛상을 수상하는 등 여전히 리그 정상급 선수였다. 게다가 부상으로 시즌아웃 된 변연하의 몫을 대신한 팀의 에이스였다.
그렇다보니 공헌도도 높았다. 김영옥은 전체 공헌도 4위였다. 가드 중에선 이미선에 이은 2위. WKBL 규정에 동 포지션 랭킹 3위 안에 드는 선수는 한 팀서 뛸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
따라서 김영옥은 이미선의 삼성생명이나 가드랭킹 3위 박혜진이 속한 우리은행으로는 갈 수 없었다. 남은 팀은 신한은행과 KDB생명, 신세계. 하지만 세 팀 역시 김영옥을 얻기 위해선 손실이 따랐다.
김영옥을 얻으려면 보호선수 3명을 제외한 한 명을 내줘야 했다.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선수를 데려오자고 주축선수를 내줄 팀은 없었다. 결국 김영옥은 어느 팀에도 선택을 받지 못 했다. 국민은행과 3차 협상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감정의 골이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다. 김영옥은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않았다.
결국 그렇게 김영옥은 공헌도 4위를 하고도 은퇴를 해야만 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였다. 여전히 그녀에겐 농구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었다.
“제가 돈 때문에 김천시청을 가고, 중국을 갔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중국에서 월 만 불을 받았어요. 그 이상은 못 주게 돼 있거든요. 전 정말 농구가 하고 싶었어요. 그것뿐이에요.”
▲이제는 쉬려고 합니다
김영옥은 긴 우승 행사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귀국했다. 완전한 귀국이다. 이제 정말 선수로서의 생활을 마무리 하고 가정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제 아이를 가져야죠. 지금도 늦었는데, 더 늦으면 안 되잖아요.”
김영옥의 표정엔 아쉬움이 짙게 베어 있다. “진짜 너무너무 아쉬워요. 중국에서도 정말 아쉬워 하더라고요. 내년에 1년 더 뛰어주면 안 되냐고요. 다른 팀에서는 자기네 팀에 와 달래요. 돈 더 준다고(웃음). 정말 조심스럽게 말씀하기도 하시더라고요. 정말 만약에, 아이를 갖는 게 잘 안 되면 꼭 오라고요. 그렇게 제가 필요하다는데···. 제가 어디 가서 그런 대접을 받겠어요.”
북경에서는 김영옥과의 이별이 아쉬운지, 아예 중국으로 건너와 사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남편 정 씨는 “제가 식당을 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식당을 하는 건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하하. 북경시랑 당이랑 팀에서 도와준다고요. 정말 대단하더라고요.”라며 웃었다.
그레이트워의 수리민 감독도 김영옥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수리민 감독은 김영옥과 남편에게 시계를 하나씩 선물했다.
“보니까 비싼 시계더라고요. 신랑이랑 이걸 받아야 되나 그랬죠. 근데 감독님 손목을 보니까 시계가 너무 허름한 거에요. 울컥하더라고요. 감독님이 ‘너랑 나는 영원한 친구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수리민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옥이 아닌 금을 얻었다”며 김영옥을 칭찬하기도 했다.
남편인 정 씨도 중국에 있었던 며칠을 잊지 못 하고 있다. 자신의 부인이 그토록 귀한 대접을 받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남편이 보는 김영옥은 어떤 사람일까?
“농구하는 걸 보면 뭘 해도 잘 했을 것 같아요. 정말 열정이 넘쳐요. 자신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신체적이나 여러 면에서요. 때로는 좀 즐겁게 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자랄 때부터 전투적으로 자랐다고 해야 되나. 좀 힘들 것 같다는 걱정이 많았죠. 자기는 아직도 피가 끓는대요. 10점을 지던, 20점을 지던 종료 버저가 울릴 때까진 경기를 포기 못 한다고요. 어떨 땐 너무 치열하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죠. 이번 중국에 갔다 온 걸로 여한이 없을 거라 생각해요. 너무 큰 환대를 받았으니까요. 전 원래 우승하고 축하연 같은 데 잘 안가요. 한국에서도 한 번도 간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도 안 갈려고 했어요. 근데 짐이 많으니까, 그거 들어주려고 간 거죠. 그리고 마지막 한 게임 정도는 보고 싶었어요. 정말 놀라웠어요. 모든 걸 다 영옥이 중심으로 해주니까요. 개인적인 욕심일지 모르지만, 이런 건 한국에서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남편은 부인의 모습에 대해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김영옥은 한국여자농구에 있어 의미 있는 일을 해냈다. 중국에 한국여자농구의 위상을 알렸으니 말이다. 그녀로 인해 한국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하지만 김영옥은 WKBL, 또는 대한농구협회로부터 상패는커녕, 전화 한 통화도 받지 못 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김영옥은 한국여자농구, 한국농구를 대표해 갔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고, 용기를 북돋아줘야 한다. 하지만 한국농구는 그녀에게 무심했다.
한국농구는 선수에게 믿음을 줘야 한다. 그들이 믿고 의지하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말이다. 여전히 한국농구는 알아야 할 일들이 많다.
▲김영옥이 전하는 메시지
김영옥으로부터 중국리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중국리그가 예상보다 여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건은 한국이 더 좋아요. 중국은 경기장이 너무 추워서 선수들이 긴 팔에 장갑을 끼고 농구를 한다니까요. 손을 ‘호호’ 불면서 계속 몸을 푸는데, 뛰면 더 추워져요.”
아시아 최강이라는 입지에 걸맞지 않게 경기장 시설은 상당히 낙후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옥은 이어 걱정스러운 마음도 전했다.
“우리나라는 체력훈련이나 프로그램이 딱딱 맞춰져 있어서 스케줄대로 훈련을 하거든요. 근데 중국은 그런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요. 웨이트 트레이닝도 없고, 체력운동도 하지 않아요. 남자농구 같은 경우에는 그런 문화가 받아들여져 있는데, 여자농구는 그렇지 않아요. 만약 그런 부분을 배운다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발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체조건이 워낙 좋잖아요.”
김영옥의 말에 의하면 훈련 시스템적인 측면에선 한국이 중국보다 낫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이 한국과 같은 시스템이 정착될 경우 지금보다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일단 기본적인 체격조건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다.
김영옥과 얘기를 하다 보니 그녀가 정말 농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김영옥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농구를 좋아하는 끊임없는 열정에 있었다.
남편 정 씨는 “농구를 하려고 그 힘든 걸 다 해내는 거예요. 휴가 때도 체육관에 가서 4~5시간을 운동하고 와요. 운동한다고 가락산 꼭대기까지 올라가기도 하고, 항상 체계적으로 운동을 해 왔어요.”라고 말했다.
여전히 20대 선수들보다도 강하고 빠른 그녀의 몸이 신기하다. 과연 그녀의 비결은 뭘까?
“단 한 번도 체력운동을 게을리 해본 적이 없어요. 작년에 은퇴했지만, 항상 팀에서 체력훈련을 하면 1등을 했거든요. 탄산음료나 커피, 과자, 튀김, 인스턴트 음식 같은 건 절대 먹지 않아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부분을 조절해서 몸 관리를 해왔어요.”
결국 타고난 부분도 있지만 노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녀가 그런 노력을 하게 된 후천적인 배경도 궁금했다.
“제가 고향이 춘천이에요. 춘천여고를 나왔는데, 저희 학교 출신들은 실업팀 오는 것도 힘들었어요. 국가대표에 뽑힌 선수도 드물고요. 배경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명문학교도 아니고, 신체조건도 좋지 않은 제가 살아남기 위해선 노력하는 것밖에 없더라고요. 남들보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됐죠. 저희 집이 딸 여섯에 아들 하나에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농**고 생각했어요. 농구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었고, 어머니한테 효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농구로 인해서 모든 걸 얻었기 때문에 놓칠 수가 없었어요. 제가 농구를 잘 해야 하는 이유, 잘 하고 싶었던 이유가 다 그런 악착같은 정신력에서 나온 것 같아요.”
이제 김영옥은 30년간 이어져온 농구인생을 마치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농구인생 마지막을 누구 못지않게 화려하게 보냈다고 말한다. 비록 조국이 아닌 타국이었지만, 그녀는 만족한다. 이제는 가정으로 돌아가 한 남자의 아내,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는 김영옥. 그녀의 제 2의 인생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길 응원한다.
#사진 - 곽현 기자, 김영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