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KBL 은퇴선수 특집 1탄 - 신혜인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선수
(1) 신혜인
현재 WKBL 최고 센터로 우뚝 선 박지수(KB)와 주목받는 신인 박지현(우리은행)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프로에 입단하기 전부터 이미 많은 농구팬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주인공이라는 것. 그런데 프로 입단 전부터 관심의 첨단에 있었던 여자농구 선수를 꼽는다면 우리는 ‘신혜인’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85년 6월 24일 생인 신혜인은 프로배구 V리그에서 삼성화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감독 신치용 태릉선수촌장과 여자농구 국가대표 출신인 전미애 전 숙명여중 코치 사이에서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배구인 아버지와 농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신혜인은 자연스럽게 운동 선수로 진로를 결정했고, 농구공을 잡게 됐다. 심지어 아버지는 일찌감치 신혜인을 선수로 키우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어려서부터 제가 워낙 에너지가 넘쳐서 운동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셨대요. 그리고 언니가 7살, 제가 5살 쯤 됐을 때, 아버지가 언니하고 저한테 배구공을 던져봤는데 저는 받으려고 달려들었고, 언니는 피하려다가 공에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언니보다는 제가 운동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대요.”
역시, 우승을 여러 차례 차지한 감독은 어린 딸들에게도 이토록 엄격했나보다. 농구를 선택한 것은 신혜인 본인의 결정. 배구인인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오히려 농구인인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고. 그러나 신혜인이 워낙 농구를 좋아해서 결국 어머니의 승낙도 받았다고 한다.
뜨거운 관심, 그리고 이른 은퇴
그러던 신혜인이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은 고교시절. 신혜인은 한 포털 사이트에서 실시한 ‘스포츠 얼짱’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며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신혜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 안정환, 시드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사격 선수 강초현 등을 이기고 1위에 올랐다. 당시 신혜인의 팬카페에는 손대범 점프볼 편집장을 비롯해 현재 현역으로 활동 중인 기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왜 거기서 1등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저희 집에서도 의아해했어요. 학교에서 친구들도 많이 놀렸죠. 예쁘고 잘생긴 분들이 많았는데 제가 여고생이었고 오히려 수수해서 더 좋게 봐주신 건 아닌가 해요.”
신혜인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신혜인은 2004신입선수 선발회에서 1라운드 전체 4순위로 부천 신세계 쿨캣의 지명을 받았다. 당시 전체 1순위는 삼천포여고 출신의 정미란(KB), 2순위는 수피아여고를 졸업한 정선화(OK저축은행), 3순위는 대전여상을 졸업한 최윤아 신한은행 코치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비해 신혜인의 프로 생활은 길지 않았다. 2004겨울리그와 2005겨울리그 등 단 2시즌만을 뛴 신혜인은 프로 통산 33경기만을 뛰었고, 2005년에 심장 부정맥 진단을 받은 뒤 은퇴를 선택했다.
“프로에 입단하기 전부터 많이 알아봐주시고 응원해주신 건 정말 감사했는데, 관심 자체가 너무 힘들었어요. 1~2년차면 당연히 배워야 할 게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경기에 못나간 것도 따로 기사가 나가고, 벤치에서 응원하고 있는 모습도 기사로 나갔거든요. 경기에 뛰지도 못했는데 인터뷰에 불려가기도 했어요. 인터뷰실에서 ‘저 안 부르시면 안 되냐’고 운 적도 있었고요.”
신혜인은 고교 시절 연맹회장기 여자 고등부 최우수선수상도 수상했으며, ‘얼짱 열풍’의 중심에 서며 여자농구의 새로운 유망주가 되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실력을 키우고, 코트에서 무언가를 보여주기 전부터 외모와 인기에만 집중된 시선이 버거웠고 그에 따라 변해가는 여론의 눈초리도 매서웠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관심이 오히려 독이 돼서 신혜인을 괴롭혔고, 코트에 서는 것조차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스스로 좋아서 선택한 농구에 대한 마음이 식어갈 때 쯤, 부정맥 진단 후 수술까지 하면서 끝내 부담을 떨치지 못했다.
“가끔 남편(배구선수 박철우)한테 그런 얘기를 해요. ‘그때 나이가 20대 중반만 됐어도 견디고 다시 도전을 했을 텐데, 그런 걸 견디기에 너무 어렸던 것 같다’고요. 선수로서의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인 것 같아요.”
관심이 컸던 만큼 부작용도 컸던 것. 신혜인은 “1라운드에 선발된 것은 운도 따랐던 것 같은데, 솔직히 프로에 지명을 못 받을 수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프로 입단과 동시에 바로 베스트 멤버로 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프로에서 적어도 3년 정도는 많이 배우면서 성장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주변의 관심은 인내심과 거리가 있었다. 당장 경기력이 나타나지 않자 ‘실력이 아니라 얼굴로 농구하냐’는 비난이 있었고, 온라인 상에는 ‘예쁘다는 것도 거품’, ‘스타병 걸렸다’ 등의 좋지 않은 말들이 번졌다. 평소와 같이 농구를 하면서 일상을 보냈지만, 내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돌고 돌아 스스로를 더 아프게 했다. ‘차라리 농구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은 농구에 대한 애정도 식어갔다.
“어린 나이에도 숙소 생활을 하면서도 힘든 걸 다 견디는 건 결국 내가 농구를 좋아하기 때문이거든요. 지금 농구를 하는 선수들도 그럴 거예요. 힘들고 어려운 고비가 있어도 결국 내가 농구를 좋아하니까 그걸 이겨낼 수 있는 건데... 저도 그렇게 농구가 좋았는데 너무 힘드니까 ‘다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견디지 못한 거 같아요. 내가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수술 후에도 그만두지 않고 더 도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지금도 해요”
그래서일까? 프로 입단 후 이른 시기에 농구를 포기하는 후배들이 꿈을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달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선수는 경기를 뛰고 싶잖아요. 저 신인 때는 사실 연습경기 말고는 어린 선수들이 경기를 뛸 기회가 없었거든요. 요즘에는 퓨처스리그도 있고 박신자컵도 있으니까, 선수들이 그런 걸로 해소를 하면서 이겨냈으면 좋겠어요. 또 선수들이 연차가 쌓이면 내공이라는 건 분명히 생기거든요. 견디고 이겨내다 보면 언젠가 치고 나갈 수 있는 계기가 생길 거예요. 안에 있을 때는 농구를 그만두면 다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도 막상 나와서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사는 게 마냥 즐겁고 재밌지는 않았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상황을 가장 힘들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 시기만 잘 견디면 기회가 생길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잘 버텼으면 좋겠어요.”
은퇴 후의 그녀
신혜인은 이후 대입준비를 1년간 하고 서울여대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마쳤다. 2007-08시즌부터는 여자농구 해설자로도 활약했고, 2010년에는 서울여대에 농구단이 창단하자 선수로 나서기도 했다. 프로 무대에 복귀하기 위한 재기의 일환은 아니었다. 농구부가 생기면서 학교 측에서 요청하여 함께 했던 것.
이제는 신혜인의 농구하는 모습을 보려면 1년에 한 번 열리는 어머니농구대회를 찾아야 한다. 신혜인은 거의 매년 숙명여고 소속으로 어머니농구대회에 참가해,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다. 라이벌 숭의여고와의 대결은 지금도 불꽃이 튄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구 스타인 남편 박철우는 종종 유모차에 아이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아내의 경기를 응원하기도 한다.
“남편이 지금도 ‘운동하라’는 말을 종종해요. 살 빼라는 얘기죠. 돌려서 ‘운동하라’는 거 같은데 정말 ‘기승전운동’이에요. 남편은 제가 농구하는 거 보는 걸 좋아해요. 운동하다 관뒀다니까 제가 농구를 정말 못하는 줄 아나 봐요. 조금만 해도 ‘잘한다’고 칭찬하거든요.”
신혜인이 요즘 몰두하는 것은 육아와 아이 옷 만들기. 전형적인 ‘손녀바보’ 외할아버지와 ‘딸바보’ 아빠 사이에서 행복하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직접 옷을 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고, 혼자 공부하고 학원도 다니며 옷을 만들게 된 신혜인은 이제 자신이 만든 옷을 직접 판매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의류 업계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과 전공자가 많은 가운데에서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고, 공장 미팅 과정에서 핀잔도 많이 듣는다며 여전히 배울 게 많다고는 하지만 신혜인이 직접 만든 옷을 본 주변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다. 든든한 후원자인 남편은 “마이너스만 내지 말라”며 지원에 나섰는데, 다행히 적자는 아니라고. 그러면서도 아이들 옷만 만들 뿐 남편 옷을 만들어 준적은 없다. “남편 옷은 사이즈가 너무 크다”는 게 이유.
의아스러운 부분도 있다. 농구를 그만둔 뒤 대학교를 거쳐 대학원까지 마친 신혜인은 교사자격증도 있다. 체육학을 전공해놓고 의류사업이라니... 뭔가 방향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심지어 주변에서 학교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기회의 제안을 몇 차례 했음에도 본인이 고사했단다.
“지금은 아이들이 먼저라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어요. 부모님이나 다른 분께 아이들을 맡기고 제 할 일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아이들이 다 크거나, 남편이 은퇴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때는 전공을 살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여전한 농구팬, 박하나-박지수 응원
신혜인은 지금도 농구를 즐겨본다. WKBL 경기를 모두 찾아보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 날 때마다 본다는 것. 지금은 정확히 ‘팬의 마음으로 농구경기를 즐기고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KB스타즈와 우리은행의 경기를 자주 본다고. 그런 가운데 신혜인이 가장 마음을 쓰고 있는 선수는 삼성생명의 박하나다.
박하나는 신혜인의 숙명여중-여고 후배.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후배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신혜인은 자신이 숙명여고를 졸업하기 전까지 숙명여중-여고에서 뛰었던 선수들 중, 현역 남아있는 선수는 이제 박하나가 유일하다며 박하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드러냈다.
“제가 고등학생 때 (박)하나가 중학생으로 숙명에 들어왔거든요. 저희 어머니가 그때 코치였는데 지방에 있던 하나를 직접 스카우트 하셨어요. 심지어 다른 학교에서는 ‘숙명에 코치 딸도 농구를 한대’라고 하면서 제가 아니라 하나가 엄마 딸인 줄 알더라고요. 하나가 예전보다 수비도 좋아졌고, 농구도 더 잘하는 거 같아서 보기 좋아요.”
그렇다면 ‘농구팬 신혜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도 박하나일까?
“박지수요!”
이 순간 신혜인은 후배를 버리고 팬심을 택했다. 애초에 KB와 우리은행 경기를 자주 본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박)지수는 고등학생 때 처음 봤어요. 그때 숙명여고랑 여중이 정말 오랜만에 같이 체전을 나가게 됐었거든요. 그런데 대진표 추첨을 하고나서 (방)지윤 언니(숙명여고 코치)가 너무 절망하는 거예요. ‘이기고 올라가도 분당을 만나는 데 거기 정말 키 크고, 정말 잘하는 애가 있다’더라고요. 키가 그렇게 크면 기본기가 부족하거나, 체력이 안 좋던가 뭔가 약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경기를 보러 갔거든요. 그런데 너무 잘하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신혜인은 박지수의 패스를 보고 감탄을 했다며, 오랜 시간 ‘박지수 찬양’을 이어갔다. 프로에 와서도 어린 연차에 이렇게 잘했던 선수는 없었다며 순수한 팬의 눈빛을 보여줬다. 너무 박지수에게 할애한 지분이 많다는 걸 느꼈기 때문일까? 신혜인은 “박혜진(우리은행)도 좋아한다”며 수습에 나섰다. 순수한 농구팬인 만큼 잘하는 선수들은 다 좋다는 게 신혜인의 결론이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던 여자농구의 유망주. 비록 코트에서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체육인 2세’, ‘대를 이은 스포츠 스타 부부’, ‘운동선수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로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농구팬으로 후배들의 활약을 응원하며, 여자농구의 인기가 다시 살아나길 기대하고 있다.
“요즘 여자배구가 인기가 많잖아요. 김연경같은 대단한 선수가 나오면서 팬들의 관심도 집중되고, 또 다른 선수들도 동기부여가 되면서 인기가 높아진 것 같은데, 여자농구도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와서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해요. 팬들도 어린 선수들이 조금 더 힘내서 많이 성장할 수 있게 긍정적인 마음으로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코트에서 함께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후배들을 응원하며, 은퇴 이후에도 인생의 2막을 훌륭히 살아내고 있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신혜인의 아름다운 삶이 계속 이어지기를,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든 농구장에서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