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KBL 은퇴선수 특집 3탄 - 하은주편-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선수
(3) 하은주
10시즌을 활약하며 총 240경기에서 평균 14분 6초를 출전했고, 8.4평균 득점에 4.1리바운드.
WKBL을 대표하는 선수였다고 떠올리기에 만족스럽지는 않은 기록이다. 하지만 기록의 주인공이 누군지, 그 이름을 들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로 통합 6연패를 달성했던 ‘레알 신한은행’의 ‘끝판왕’ 하은주다.
하은주.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출전 시간의 제한이 있었지만 코트에 있는 동안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호화멤버를 자랑했던 신한은행의 마지막 퍼즐이었음을 증명하듯, 플레이오프에서는 평균 17분 36초를 뛰며 13.1점을 득점하는 등 더 높은 집중력을 보여줬다. 챔피언결정전 MVP를 3번이나 차지하며 타미카 캐칭, 박혜진(이상 우리은행)과 함께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을 보유중이다.
신한은행의 통합 6연패를 빠짐없이 함께했고, 신인상에 이어 총 4차례의 2점 야투상을 수상했으며, 국가대표로도 활약하며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cm의 절대적 높이. 하은주와 같은 시대를 뛰었던 선수들 중, 그와 다른 유니폼을 입었던 이들은 “분명 205cm가 넘을 것이라며 ‘신장 축소 미스터리 음모론(?)’을 제기한다. 상대 선수들에게 하은주의 체감 높이는 그의 신장 이상이었던 것이다.
농구인 출신의 아버지와 어려서부터 탁월했던 신체조건은 그를 일찌감치 농구선수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 실제로는 하은주의 의지와는 다른 진로선택이었다.
“솔직히 어릴 때 농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오히려 공부하는 걸 더 좋아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도 농구 선수셨고, 키가 워낙 컸던 탓에 어느 종목에서나 탐을 내긴 했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농구선수의 길로 접어들었죠.”
하지만 그의 선수생활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엘리트 스포츠 특유의 강한 훈련과 자유로운 생활의 제한 등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무릎에 이상이 생기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선수를 시작한지 1년 만인 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무릎에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경기를 거를 수는 없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선수의 타고난 신체조건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농구는 더욱 그렇다. 압도적인 높이를 극복하기에는 기술과 스피드, 관록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궁극의 위력’을 자랑하는 하은주가 무릎 통증을 이유로 농구공을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너무 어려서부터 무릎이 아프니까 심각한 줄을 몰랐어요. 운동을 하면 다 그런 줄 알았고, 다른 선수들도 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죠. 다리를 절면서 뛰고도 몰랐던 거예요.”
결국 농구를 시작한지 1년 만에 병원에서 무릎 연골이 상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초등학교를 졸업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선수 생활은 힘들다’는 진단을 받은 것. 중학교를 올라가기 전에 무릎 수술을 받았지만 의사의 진단은 바뀌지 않았다. 진단과 치료, 수술 과정을 거치며 마음의 상처까지 받은 하은주는 이 시기에 농구를 내려놓았다. 농구부가 있는 학교로 진학했지만, 농구부에는 적을 두지 않았다. 평범한 학생의 삶을 살았다. 학교에서 강력한 추천이 이어져, 3학년 1학기에 잠시 복귀를 했지만 재활만 하다가 학기를 마쳤고, 전학을 갔다. 농구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아무래도 미련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중3때 제키가 190cm가 넘었으니까 더 그러셨겠죠.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재활이라는 게 많이 보급되지 않아서, 제 무릎 상태는 정말 어느 학교를 가도 선수를 할 수 있도록 맡길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일본에서 ‘책임지고 만들어보겠다’고 나선 분들도 계셔서 일본 유학을 선택하게 됐죠. 저는 그때도 ‘농구를 다시 한다’기 보다 ‘무릎이 괜찮아지게 해준다’는 부분에 더 마음이 있었어요.”
솔직히는 한국을 떠나있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무릎 수술과 치료 과정에서 상처를 받았던 하은주는 중학교 시절에도 농구를 그만두는 과정에도 많은 부침을 겪어야했다. 어린 나이에 ‘한국’과 ‘농구’라는 교집합은 그에게 큰 상처와 부담이었다. 결국 하은주는 일본 여자농구 최고 명문 중 하나인 오호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요즘 한일관계가 좋지 않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조심스럽기는 한데, 솔직히 일본에서의 생활이 저는 나쁘지 않았어요. 말이 안 통하는 걸 제외하고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본에서 재활을 받으면서 무릎이 어느 정도 회복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을 다시 하고, 농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됐죠.”
일본 WJBL 샹송화장품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던 하은주는 2006년 귀국했고, 신한은행과 계약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길을 열어주셔서 신한은행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팀들이나 여자농구 관계자분들에게 참 감사해요. 그때 국내 프로팀에서 저를 받아주지 않았으면 거기서 그냥 은퇴했을 텐데, 길을 열어주셔서 그 후로 12년을 제가 더 선수생활을 했잖아요. 제가 운도 좋았던 것 같고, 많은 분들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두려움도 있었다. 어린 시절 일본 유학을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무릎 부상이었고, 어린 나이에 받은 상처도 상당했다.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운동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막상 와보니 달랐어요.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많이 생각했는데, 정말 팀에서 가족처럼 대해주셨어요. 제가 팀이랑 잘 맞은 부분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나라 스포츠도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해요. 제가 적응하기 쉬운 환경이었다는 부분도 참 감사한 부분인 것 같고, 그래서 더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현역 시절을 말할 때 ‘레알 신한은행’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하은주는 활짝 웃었다. ‘꿈같은 이야기’라고 말한 그는 여전히 신한은행에 애정이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지금도 종종 여자농구를 챙겨본다는 하은주는 그렇기에 지난 시즌 신한은행의 고전과 부진이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장기간 상위권을 지킨 팀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랄까? 오랫동안 상위권에 있으면 세대교체 시기를 놓칠 수도 있고, 그만큼 좋은 선수를 뽑을 기회를 못 잡게 되잖아요. 사실 저는 신한은행이 한참 좋을 때 함께 했다가, 팀이 힘들어질 즈음에 은퇴를 선택해서 미안한 마음도 커요. 하지만, 신한은행이 최근 몇 년 간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밑거름을 갖춰놓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미안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도 있지만, 다시 올라갈 거라는 기대도 갖고 있어요.”
하은주는 WKBL입성 후 선수로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수많은 개인상을 수상했고, 6번의 리그 통합 우승, 그리고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우승과 영광의 순간의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여전히 더 컸다. 이루지 못한 목표에 대한 미련은 아니었다.
“통합 6연패도 그렇고, 그 많은 영광의 순간이 정말 대단한 거였다는 걸 지나서 알았어요. 이제 와서 더 크게 느껴요. 그 기쁨의 순간을 제 자신이나 팀 동료들과 함께 느끼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요.”
신한은행의 통합 6연패를 이끌었던 임달식 전 감독이나 이후 통합 6연패를 이어받았던 우리은행의 위성우 감독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우승을 한 그날은 기쁘지만 다음날부터는 다시 자리를 지키기 위한 스트레스와 싸워야 한다’는 것. 최강의 팀으로 거듭나며 왕좌를 지키게 되면 언제가부터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주변의 시선과도 치열한 싸움을 펼쳐야 한다. 이는 선수들도 마찬가지. 게다가 당시 신한은행은 최강의 선수 구성을 자랑했던 만큼, 경기를 이겨도 당연한 것이었고, 오히려 결과보다 내용을 놓고 분위기가 가라앉는 분위기가 많았다. 승리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가 힘들었다.
“‘그 멤버로 그거밖에 못하냐’, ‘그 멤버로 지는 게 말이 되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고, 그래서 이겨도 기뻐할 겨를이 없었어요. 또 우승을 해도 겸손해야 한다는 그런 분위기 때문에 좋아도 티를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았고요. 힘든 훈련을 이기고, 함께 해서 목표를 달성하는 거니까 후배 선수들은 그런 결과를 냈을 때 정말 온전히 기뻐했으면 좋겠어요.”
하은주는 최근 경쟁 종목에 비해 인기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구의 문제점 중 하나도 바로 이 부분인 것 같다고 언급했다.
“배구를 보면 지고 있는 팀도 1점을 내면 웃으면서 함께 모여서 세리머니를 하고 파이팅을 하는데, 농구는 그게 안 되잖아요. 아무리 멋진 플레이를 해도 바로 수비해야 하니까 백코트 하느라고 바쁘죠. 작전타임이 불려도 세리머니를 거의 못해요. 눈치 보는 것도 많고요. 다른 종목은 좋은 플레이가 나왔을 때 웃고 좋아하는데, 농구는 그런 거 상관없이 계속 힘들고 인상만 쓰고 있으니까, 팬들이나 시청자도 채널 선택을 할 때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선수들이 좋은 플레이가 나왔을 때 같이 기뻐했으면 좋겠어요.”
하은주는 경기 도중에 과감하게 세리머니를 하거나, 플레이가 잘되고 있다고 웃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에라도 승리에 대해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시즌 KB를 보면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졌을 때는 져서 속상하다는 게, 이겼을 때는 이겨서 신났다는 게 매 경기 선수들 표정에서 보였어요. 그래서 KB가 우승한 것도 저는 보기 좋았어요. 사람들은 드라마를 좋아하고, 스포츠도 경기 안에 희로애락이 다 있잖아요. 속상하고 화날 때도 판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표현을 하고, 기쁘고 신날 때는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선수 시절에도 학업을 병행했던 하은주는 은퇴 후에도 공부를 계속했고, 스포츠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도 다녀왔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현재는 경기도 수원에서 ‘웨이크업 바디 운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하은주는 운동보다 힘들다는 재활을 어린 시절부터 숙명으로 달고 있어야 했고, 압도적인 신체 조건으로 인해 좋은 결과를 거둬도 칭찬보다 비난을 마주해야 했다. 가장 큰 기대를 받으면서도 몸과 마음에 가장 큰 상처를 안고 선수 생활을 이어갔던 하은주다. 그랬던 그의 선택이기에 스포츠 트레이닝과 심리 센터 대표라는 제2의 인생은 더욱 관심이 간다.
“우리나라 구단들이 예전보다 스포츠 심리학이나 멘탈 트레이닝에 대한 가치를 더 높게 보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여전히 ‘선수의 경기력을 높이는 심리적인 방법’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도 있어요. 제 경험이나, 상담을 오는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가장 큰 문제는 경기력이 아니라 지금 현재 자신의 상황이거든요. ‘저 정말 죽겠어요’라고 하는 선수한테 경기력 향상을 위한 상담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여전히 ‘선수는 운동을 잘하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선수가 행복해야 경기력도 발전한다’는 게 먼저거든요.”
선수들이 이겼을 때 그 기쁨을 더 즐겼으면 좋겠다는 것도, 선수 스스로 농구에서 즐거움을 찾고 내적 동기부여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수들이 농구 자체에서 더 즐거움과 기쁨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마지막으로 농구팬들에게는 WKBL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응원을 부탁했다.
“이제 은퇴를 하고,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여자농구를 정말 사랑하고, 늘 지켜보고 있습니다. 팬 여러분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경기장에도 자주 찾아주시면, 선수들이 더 힘이 나서 좋은 경기를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사랑과 끊임없는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